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드로 윌슨 (문단 편집) == 평가 == > “그가 취임한 지 만 100년이 되었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를 결론 내리지 못했다." 2013년 뉴스위크지, 데이비드 프룸의 평가 [[https://www.newsweek.com/mystery-man-woodrow-wilson-62813|#]] > 청교도 학교장(Puritan schoolmaster), 도덕적 이상주의자(moral idealist), 도그마적인 민주주의 예언가(dogmatic prophet of democracy) 당대의 언론인 프레드릭 루이스 앨런(Frederick Lewis Allen, 1890-1954), 저서 "격식없는 [[1920년대]] 역사(An Informal History of the 1920's)[[http://gutenberg.net.au/ebooks05/0500831h.html|#]]"에서.[* 사실 이 평가는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 앨런의 평은 윌슨이 민주주의를 세계에 퍼트리겠다는 이상을 가진 자였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 국제 질서가 얼마 안가 무너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심지어 앨런은 같은 전시 대통령 링컨과 비교하면서, 링컨은 성공의 순간에 죽을 수 있는 행운을 얻은 반면 '''윌슨은 그러지 못했다'''고 평가를 마무리 짓는다. 즉, 앨런은 윌슨의 이상은 높게 봤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가동될 플랜을 짜놓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인데, 현대에선 그 이상조차 사실은 위선스러운 측면도 있어보인다고 까는 주장이 나오는 걸 보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호평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드로 윌슨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미국을 관통하던 [[혁신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그의 행적을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학자 시절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창하며 당시 횡행하던 [[엽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행정에 실적주의를 도입하여 현대 미국 [[행정학]]의 시초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행정학상 최초의 논문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 1887)'를 발표하여 지금도 행정학 교과서 및 수험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또 진보적인 리버럴 성향을 띠고 있던 윌슨은 국내 정치에선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을 추진했고, 웬만하면 유럽에 직접 개입하지 않던 기존 미국의 입장을 선회해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한편, 윌슨은 국제 외교에서 '힘의 균형' 원리에 대립되는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웠으며,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독일에 대해 연합국의 도덕적 [[명분]]과 [[이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라는 당대의 트렌드 앞에서 말로만 이상을 떠들었지 현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이전 공화당 정부처럼 군사력 중심의 [[패권주의]]로 일관한 위선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윌슨의 이런 이중적인 행보는 노동 문제에서도 나타났는데,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키며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해줬지만, 세계 대전 당시엔 또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 윌슨이 주장한 14개조 평화 원칙과 그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 역시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지배 아래에 놓인 폴란드,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과 발칸반도에 있는 유럽 국가에 한해 적용되었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식민지는 알 바 아니었다. 상기했듯 아이티와 도미니카를 보호국화하고 쿠바, 파나마, 러시아 등에 파병하며 자결주의와는 거리가 먼 내정 간섭을 이어가기도 했다. 다만 윌슨은 미국의 [[윌리엄 글래드스턴|글래드스턴]]으로 불릴 정도로 전쟁에 꾸준히 반대해왔으며--그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벤자민 디즈레일리|디즈레일리]]?--, 전후에도 자신의 입지와 무관하게 이상주의자란 욕을 먹으면서도 14개조 평화 원칙과 [[국제연맹]]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고 [[미국령 필리핀]]의 자치권을 확대시켜주는 등 마냥 제국주의자로만 몰기엔 다른 모습을 제법 보인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 인물. 특히 그가 주창한 공개조약, 자유무역, 민주주의, 반내셔널리즘 같은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기도 했다. 윌슨은 [[베르사유 조약]] 당시 회의장에서 패전국 관련해 '''가장 관대한 조건을 제시한 연합국 리더'''였다. 하지만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특히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강경했던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가[* 그는 독일을 무척 싫어해서, [[유언]]도 '''"나의 시체를 독일을 향해 선 채로 매장하라"'''라고 했을 정도였다.] 관대한 조치에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클레망소는 윌슨을 보고 "당신은 강철 심장(heart of '''steel''')을 가진 사람이오!"라고 비꼬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입은 피해가 막대한데 윌슨이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니까 반대로 '동맹국한테 너무 냉정한 것 아니냐'는 뜻으로 비꼰 것이었다. 다만 이에 윌슨은 "그래도 전 도둑놈 심보(heart of '''steal''')는 없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steel과 steal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 --이와중에도 유머는 잃지 않았다.--] 조약은 윌슨의 의향과는 달리 가혹하게 변모했다. 하지만 이런 전후 사정을 잘 몰랐는지, 당시 영국 재무부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케인스]]는 윌슨을 "세계 최고의 협잡꾼"이라고 까기도 했다. 케인스는 독일에게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과 징벌이 [[제2차 세계 대전|또다른 비극과 전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조약의 위험성을 윌슨에게 경고했다. 물론 베르사유 조약을 강경하게 만든 건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이니 윌슨은 억울할 것이다.[* 참고로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은 처음에 14개조 평화 원칙을 받아들이라고 요구받았을 때 코웃음을 쳤지만 종전 후 프랑스의 가혹한 요구가 있을 것임을 알자 태도를 바꿔 14개조 평화 원칙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결국 [[베르사유 조약]]행.]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 [[에드워드 카]]도 '20년의 위기'에서 우드로 윌슨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 기존의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국제연맹이란 집단안보체제를 만들었는데, 상당히 현실적인 제약점들[* 무엇을 안보로 위협하는 세력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재가 마땅한가? 집단안보를 지키기 위해 각국은 그렇게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사실, 이 모두가 합의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합의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한국전쟁 참전 역시 소련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가능했다. 덤으로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이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이라 참전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비상사태 발생시 모두가 동의하는 대응책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있었다는 것. 게다가 자기가 제안해놓고 의회 비준을 못 받아서 정작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도 못하는 코미디스런 일도 벌어진다.(...) 물론 윌슨도 의회 욕하면서 열심히 여론 조성하려 뛰어다니긴 했다만, 그 와중에 뇌경색이 와 리타이어하고 말았으니.. 하여튼 그 결과 독일의 폭주를 방치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1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허술하게 짰다'는 것. 다만 그가 제시한 집단안보체제는 이후 FDR-트루먼 시대 들어 [[유엔]] 안보리와 유엔군으로 어느정도 실현되긴 했다. 여기도 집단안보체제의 취약성을 어느정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냉전 등 위기 속에서도 세계대전급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게 통제하고 있으니 분명 평가할 점은 있다.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인종차별철폐 제안을 내놓자 윌슨은 반대했다며 그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백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일본의 제안은 그보단 일본 국익을 대변한 의도가 강하므로 적절한 비판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본은 국제연맹 규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참가하는 나라는 각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삽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선 본토로의 동양인 이민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은 이미 이민 제한을 받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같은 경우는 아예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임차를 금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본 외무성은 노골적인 이민차별철폐 규정을 내세우는 대신 반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인종차별철폐를 국제연맹 조약 규문에 넣으려 한 것이다. 물론 의도를 간파한 규약 작성 위원회 의장 우드로 윌슨은 안건의 중요성을 이유로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찬성 11, 반대 5로 이 제안은 부결되었다. 즉, 일본의 제안은 인종차별을 표면에 내세운 자국이익을 위한 주장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대 또한 백인만을 위한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마냥 몰아붙일 건 아니다. 국제연맹 가입을 위한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일본인 차별은 챡한차별??--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윌슨 자체는 현대에도 중간 이상은 가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긴 한다.[* 과거엔 위대한 대통령 순위 같은 거 매기면 10위 안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2009년 부시 퇴임 이후에도 전체 42명 중 9위를 기록한바 있다. 다만 상기했듯 위선스러운 면모나 백인우월주의자였다는 의혹이 부각되면서 평이 예전보단 좀 깎이는 모양새.] 즉, 우드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를 등에 업은 혁신가'''였다는 견해다. 진보주의와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평가 이면에는 '''Ku Klux Klan([[쿠 클럭스 클랜|KKK]])'''단을 이용해 상하원에 정치적 세력을 불린 현실이 있었다. 이는 그의 배경을 살펴봐야 좀 더 이해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민주당의 텃밭은 지금의 북부가 아닌 윌슨의 고향이기도 한 '''남부'''였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한 주가 많던 그 남부 지역 말이다. 덕분에 19세기만 해도 민주당은 지금의 리버럴함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보수 성향의 정당이었으나[* 좀 더 정확하겐 남/북부민주당 드립처럼 고보수주의자들과 고전적 자유주의자 등이 뒤섞인 정당이었다. 참고로 19세기 미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큰 주제 2가지는 중앙집권화식 강한 연방주의 vs 주의 권리를 존중하는 반연방주의와 노예제 찬/반 문제였는데, 그러다보니 기존 연방정부가 노예제의 잘못을 공감할지라도 주의 권리를 존중해 노예주 허용주가 많던 남부 지역에 개입하기 어려운 혹은 확산만 방지한다는 식으로 방관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남북전쟁이 터진 것.], [[윌리엄 J. 브라이언]] 이후 20세기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해 FDR 시절 뉴딜, 이후 민주당 정부의 [[흑인민권운동]] 지지, 이 틈새를 노린 공화당의 남부 전략 등이 겹쳐져 지금의 텃밭, 성향 체인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윌슨 역시 진보, 자유주의 컨셉을 내세운 대통령이긴 하지만, 여긴 뉴딜 동맹처럼 어떤 진보적 벨트를 만들진 못했고, 진보주의자면서도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희한한 스탠스 때문에 후대에 평가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러니 아직 이런 성향이 남아있던 민주당과 남부 시절을 겪은 윌슨이 짬뽕된 성향을 가지는 것도 어찌보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러다보니 윌슨이 [[백인 우월주의|백인우월주의자]]였다는 의혹도 심심찮게 나오곤 있는데, 남부 지방의 우정국을 맡았을때 흑인들을 해고하고 백인 인사들을 채워넣었다는 말도 있고[*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승만]]한텐 또 잘해준 일화가 있다. 어쩌면 실제로는 [[백인 우월주의|백인 우월주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나, 상술한 그의 출신지인 [[미국]] 남부 지역의 특성과 지금 이상으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대의 미국 사회로 인해, 여론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시류에 편승한 한계를 보인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이승만과의 일화나, 그가 주장했던 [[민족자결주의]]는 이런 막장스런 시류에서 소극적으로나마 자기 소신을 보이고자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쿠 클럭스 클랜|KKK단]]을 미화한 영화 <[[국가의 탄생]]>을 보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미국 비영리 공영방송인 PBS의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내용.[[http://www.pbs.org/wnet/jimcrow/stories_events_birth.html|#]] 윌슨 대통령은 자신의 대학 클래스메이트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잘 만든 영화[* 윌슨의 말을 직역하면 전기로 쓴 역사라고 한 것인데, 쉽게 표현하면 "잘 영상화 시킨 실제 역사다."라고 찬사하는 의미다.], 불행한 점은 이게 잔인하게도 사실이라는 거다(it is like writing history with lightning. And my only regret is that it is all so terribly true)."라는 말로 칭찬했는데, 이후 논란이 거세지자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고 한다.(...) 이런 이력들 덕분에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윌슨의 인종차별적 면모가 부각되자,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는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국제문제대학원'과 기숙사에서 기념되던 윌슨의 이름을 빼버렸다. 윌슨과 동시대를 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공화당을 지지하다 1916년 재선거 무렵에는 윌슨을 지지했는데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들은 윌슨이 크게 헤맸다고 했습니다. 뭐, 제 생각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전 그가 헤매도 항상 '''앞으로 나아가면서''' 헤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 윌슨은 [[스페인 독감]]을 세계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의 기원으로 미국 [[캔자스]] 주를 지목하고 있는데,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파병을 준비하던 시점에 이미 독감증세를 보이던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독감증세를 보이거나 의심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은 파병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윌슨은 이를 무시하고 모든 병사들의 파병을 강행했다고 한다. 결국 매주 수천명의 미군병사들이 대서양으로 파병되었고 열악한 전선의 사정과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엄청난 확산을 일으키고 말았다는 주장. 이러한 점들에서 윌슨은 역사학자들과 일부 일반인들 사이에서 평가가 제일 많이 차이가 나고 있다.[* 실제로 유튜브 영상에서(영어 버전) 미국 대통령 순위에서 일부 영상들은 윌슨이 중위권~하위권으로 나오는 영상들도 일부 있다.][* 또한 후에 대통령을 역임하는 대통령이자 윌슨보다 평가가 약간 높은 [[린든 B. 존슨]], [[로널드 레이건]], [[버락 오바마]] 등등도 부정적 평가가 존재해 역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평가가 많이 차이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